2005.06.07 Tue
자본주의와 기독교
중세 교회는 봉건 지배체제의 일부였습니다. 교회는 엄청난 땅을 소유했고 평민들에게서 세금을 걷고 사법권의 상당 부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하느님이 준 권력인 국왕과 하느님의 대리인인 교회에 복종해야 한다” “현실은 죄로 물든 고통스러운 것이며 인생의 진정한 목적은 천국에 가는 것이다.”
그럴싸한 말이지만, 이 설교에 따르면 모든 현실적 욕망(부도덕한 탐욕뿐 아니라 인간 해방의 욕망 같은 정당한 것까지 포함한)은 사악하고 부질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 자체로 봉건체제의 지배이데올로기였습니다. 성직자와 귀족을 제외한 전체 인구의 95%가 넘는 사람들이 그런 신앙의 사슬에 묶여 수입의 8할 이상을 귀족과 교회에 바치며 평생 죽도록 일만 했습니다. 죽어서 천국에 가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현실적 욕망을 사악한 것이라 설교하는 교회는 현실적 욕망에 가장 충실했습니다. 토지와 돈에 대한 교회의 탐욕은 그야말로 끝이 없었고 평민들의 불만도 점점 높아갔습니다.
상공업이 발달하고 도시가 생기면서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중세 사회는 성직자와 귀족이 제3신분인 평민들을 착취하는 사회였지만 평민들 가운데 일부가 새로운 중간계급을 이루기 시작했습니다. 이른바 부르주아가 출현한 것입니다. 부르주아들은 한편으로 저술가, 의사, 교사, 변호사, 판사들이었고 다른 한편으로 상인, 제조업자, 은행가들이었습니다. 부르주아는 무능한 귀족과 타락한 교회와 대결하기 시작했습니다. 부르주아들은 경제에서 자유방임, 사회적으론 ‘이성의 지배’를 표방하며 성장했고 자신들에게 마지막 남은 제약, ‘신분’을 해결합니다. 그게 바로 시민혁명입니다.
시민혁명은 프랑스 혁명, 영국혁명, 이렇게 일컬어지는 사건이지만 봉건사회가 부르주아에 의해 점령되는 수백 년에 걸친 과정이기도 합니다. 종교개혁은 그런 과정의 제1막입니다. 흔히 종교개혁을 타락한 교회에 대한 정당한 저항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종교개혁의 의미를 기독교라는 카테고리 안에서만 보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은 부르주아가 봉건 지배체제로서 교회를 자신들의 체제로 변화시키는 사건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을 통해 교회는 달라졌지만, 교회가 지배체제의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봉건시대의 교회는 부를 더러운 것이라 설교했지만 종교개혁가들은 부는 하느님의 축복이라 설교했습니다. 칼빈은 최초의 기업정신을 만듭니다. “사업으로 얻는 소득이 토지 소유로 얻는 소득보다 많아서는 안 되는 이유가 뭔가? 상인의 이윤이 그 자신의 근면과 성실에서 오는 게 아니라면 대체 어디에서 온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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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베버는 칼빈이 말한 근면과 성실, 그리고 금욕으로 요약되는 이른바 ‘프로테스탄트 정신’이 자본주의를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돈을 축적하는 일은 죄가 아니라 하느님이 축복하는 선한 일이 되었기 때문에 자본주의적 축적이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맑스주의는 생산력이 발달하고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만들어지면서 그에 조응하는 정신적인 가치들이 생겨났다고 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프로테스탄트 정신이 어떻게 생겨났는가가 아니라 그 정신이 현재 우리에게 무엇인가, 입니다. 프로테스탄트 정신이 봉건사회에 대한 저항으로서 갖는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의미보다는 그 정신을 담은 자본주의 사회가 어떤 사회인가가 더 중요합니다.
부의 축적은 칼빈이 말한 대로 여전히 근면과 성실, 그리고 금욕으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물론 성공한 자본가들은 자신이 정당하게 부자가 되었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 그런 선전들을 많이 합니다. 우리는 김우중 씨의 안경다리가 20년 된 것이라느니 정주영 씨가 근검절약이 몸에 밴 사람이라느니 하는 이야기들을 수도 없이 듣습니다. 그들이 ‘안경다리’가 아닌 개인 용도에 상상하기 어려운 돈을 쓰기도 한다는 점에서 그들의 근검절약은 그들의 호사 취미일 뿐입니다. 그러나 좀 더 본질적인 문제는 그들의 부가 근검절약으로 축적된 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평생 모은 돈을 대학게 기부하는 김밥 할머니가 아닙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가 부를 축적하는 원리는 어디까지나 노동자의 잉여 노동입니다. 즉 노동자의 100원어치 노동을 60원에 사 40원을 먹는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교회가 사회적 불평등에 참여하는 전통적인 방법은 이른바 자선입니다. 미국의 자본가들은 자선 사업에 기부함으로써 사회적 영웅 대접을 받습니다. 그러나 자선은 두 가지 문제를 갖습니다. 하나는 그 대상이 되는 사람들을 ‘불쌍한 인간’으로 만드는 것인데 이것은 전혀 신앙적이지 않습니다. 둘째는 자선이 가난의 부당함과 가난을 만드는 사회적 모순을 은폐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든 어떤 노동이든 사람이 일주일에 40시간 이상 노동을 하면 먹고 살 수 있고 얼마간의 인간적인 여가를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문제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가 못하다는 것이고 우리는 그런 불공정한 상태를 고쳐내야 합니다. 자선은 바로 그것을 값싼 눈물과 감동으로 차단합니다.
우리는 워낙 반공주의 경향이 강한 나라에서 살다보니 흔히 자본주의는 다 같은 줄 알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미국은 우리보다는 나은데 유럽은 또 미국과 전혀 다릅니다. 우리 기준으로 보면 유럽 나라들은 사회주의 사회에 가깝습니다. 근래 미국의 제국주의적인 정책에 열심히 따른다고 비난을 받는 영국만 보더라도 의료와 교육이 전액 무료입니다. 독일이나 프랑스의 사회복지는 말할 것도 없고 북유럽 쪽의 사회복지는 서유럽보다 더 높은 수준입니다. 몇 해 전에 노키아의 부회장이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과속으로 걸려서 범칙금으로 1억 3천만원을 냈다는 이야기는 잘 아실 겁니다. 그런데 작년 말엔 같은 핀란드의 27살짜리 부자가 자동차 과속으로 2억 5천만원을 냈습니다. 우리는 이건희가 과속을 하건 40대 무주택 가장인 김 아무개가 과속을 하건 똑같이 3만원을 내는 걸 공정하다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유럽에서 기독교는 뚜렷하게 쇠락하고 있습니다. 현대 신학의 중심지라는 독일의 교회는 노인들만 몇몇 앉아서 예배를 봅니다. 반면에 미국이나 한국처럼 자본주의적 모순이 좀 더 노골적인 나라에선 교회가 차고 넘치지요. 이것은 현재 기독교의 정신이 자본주의적 모순이 좀 더 노골적인 사회에 부응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기독교 정신이 인류의 미래에 전혀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유럽 사회의 사회복지는 본디 자본주의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그 사회들은 러시아보다 더 먼저 사회주의 나라가 될 뻔 했고 그걸 막기 위해 사회주의자들과 타협을 했던 것입니다. 물론 사회주의는 유물론을 기초로 하고 유물론자들은 대개 하느님의 존재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떠받드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사람답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기독교의 본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기독교의 본래 정신은 프로테스탄트 정신도 종교개혁의 정신도 아닌 예수의 정신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는 건 기독교인에게 당연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만 강조하여 예수가 우리에게 가르친 삶의 방식을 외면하는 건 종교체제로서 기독교나 교회에 사로잡혀 예수를 다시 한번 팔아먹는 행위라는 것을 되새겨야 합니다. 예수는 단 한 번도 새로운 종교를 만들려고 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는 단지 어떻게 사는 게 사랍답게 사는 것이고 하느님을 섬기는 삶인지 몸소 보여주었습니다. 교회는 그런 삶을 실천하고 전하기 위한 조직입니다.
기독교 정신의 가장 위대한 지점은 ‘하느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형제자매’라는 것입니다. 백인이든 흑인이든 여성이든 남성이든 어른이든 아이든 부자든 가난뱅이든 배운 사람이든 못 배운 사람이든, 심지어 기독교인이든 불교신자든 이슬람교도든 모든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형제자매입니다. 예수는 바로 그 사실을 몸소 보여줌으로써 유대인의 신으로 여겨지던 하느님이 온 인류의 신임을 가르쳐주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형제자매’라는 건 참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그 정신은 어떤 형태의 차별이나 착취도 불가능하게 합니다. 사회주의가 분배의 공정함을 목표로 한다면 기독교 정신은 분배의 공정함을 이룬 다음에도 남는 ‘내 형제에 대한 염려’입니다.
기독교인에게 남보다 더 좋은 것을 입고 먹는 일은 바로 헐벗고 가난한 내 형제에 대한 배신입니다. 8억이 넘는 사람들이 굶주림에 허덕이고 그 가운데 3억이 어린 아이들입니다. 기독교인은 바로 지금 자기마치 3억 명의 제 새끼가 굶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은 어떤 맛있는 걸 먹을까 찾아다니고 돈을 들여가며 비만을 치료하고 지역마다 음식 쓰레기를 맡지 않겠다고 싸웁니다. 이역만리 어느 곳에 부당하게 고통 받는 사람이 단 한명이라도 있다면 기독교인은 편하게 잠을 이룰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바로 ‘내 형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사실에서 기독교가 사회주의를 훌쩍 뛰어넘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회주의는 공정한 분배체제를 만들 수는 있었지만 사람들에게 그런 마음을 키워내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것을 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런 마음에서 출발합니다. 교회는 그런 마음을 키우고 실현하는 공동체입니다.
예수는 지난 2천년 동안 단 한 번도 제대로 이해받지 못했습니다. 그 중요한 원인은 예수의 정신이 너무나 현대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정신엔 사회주의, 여성주의, 생태주의, 아동인권을 비롯한 인류가 현대에 들어서야 깨달은 여러 소중한 정신들이 이미 들어 있습니다. 이를테면 예수의 일행엔 언제나 여성들이 여럿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류 역사의 어떤 현인이나 종교 창시자도 여자를 일행에 포함시킨 일이 없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자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2천년 전에 여자들과 동행했고 여자 가운데서도 가장 천한 성매매 여성과 인격적으로 교우했습니다. 예수의 그런 행동이 사람들을 얼마나 당혹스럽게 만들었을지 사회에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을지 잘 생각해보십시오. 오늘 기독교인은 과연 어떤 행동으로 사회에 당혹감과 충격을 주고 있습니까?
기독교는 예수의 정신을 되찾아야 합니다. 이기심과 사적 소유를 기반으로 한, 땀 흘려 같이 일하고도 남보다 수천 수만배의 돈을 벌어들이는 사람이 찬미되는, 계급적 착취와 제국주의적 착취가 공공연한, 사랑이나 존경까지도 돈으로 매매되는 자본주의는 기독교인에게 말 그대로 악마의 사회체제입니다. 이른바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자본주의는 초기 자본주의의 야만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80년대 말 자본주의의 강력한 경쟁자이던 동구 사회주의들이 몰락하면서 더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지금 인류를 나락으로 떨어트리고 있습니다. 빈부격차는 급속하게 벌어지고 이윤을 차지하기 위해선 공공연한 침략전쟁도 불사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그런 현실에 대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응하기는커녕 오히려 그에 부응하고 있습니다. 그런 현상이 가장 강한 교회가 바로 한국의 교회입니다. 한국 교회가 이렇게 된 배경은 흔히 미국식 근본주의 기독교, 말하자면 지금 부시 일당이 믿는 그런 기독교가 들어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맞는 얘기지만 보다 더 결정적인 배경은 세계 교회사에서 유례가 없다는 이른바 ‘한국교회의 놀라운 부흥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놀라운 부흥은 주로 박정희 개발 파시즘 기간 동안의 일입니다. 물론 그건 시간상의 우연한 일치가 아닙니다. 한국교회는 개발 독재의 가장 충직한 선전선동 장치였습니다.
“믿으면 받는다” 라는 한국 교회의 설교는 “하면 된다” 라는 개발 독재의 구호와 일치했습니다. 한국 교회의 무조건적 반공주의는 민주주의적 의견을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독재의 의도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또한 교회는 사람들의 자연스런 저항의식을 배설하게 하는 공간이었습니다. 관제 행사가 아니라면 여럿이 모이는 일조차 불편하던 시절, 교회는 사람들이 마음껏 소리치고 교제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습니다. 특히 파시즘이라는 사회적 억압에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식의 전근대적 가부장제에 시달리던 여성들에게 교회는 그야말로 해방의 공간이었습니다. 게다가 믿으면 남편도 자식도 잘된다는데 당시 여성들에게 그보다 더한 가치가 어디 있겠습니까. ‘아줌마’들은 교회 부흥의 돌격대가 되었습니다.
‘한국 교회의 놀라운 부흥사’는 그렇게 씌어졌고 오늘 한국 교회는 세계에서 가장 저급한 신앙관을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90년대 이후 우리 사회는 파시즘이 물러나고 민주화와 개혁이 진행되었지만 파시즘이 있던 자리를 대신 자본이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자본의 지배는 파시즘의 지배처럼 폭력이나 억압을 통한 게 아니라 사람들에게 자본의 달콤한 욕망을 심어주어 스스로 복종하게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돈이면 뭐든 다 된다는 생각을 심어주어서 사람들이 돈 앞에 무릎 꿇게 만드는 것이지요. 인간적이고 품위 있는 세상에 관심을 갖기 보다는 부동산과 통장 잔고에 집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교회는 새로운 지배자에게도 ‘준비된’ 선전선동 장치입니다.
제가 한국 교회를 욕하고 있지만 한국 교회에는 예수의 삶을 본받으려는 세계 교회사에 중요하게 기록될 만한 소중한 실천들도 존재했습니다. 70년대와 80년대 초에 모든 사회운동의 중심에 진보적인 교회가 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정신을 갖는 교회는 이제 이곳 향린교회와 몇몇 곳을 빼고는 거의 없습니다. 이젠 거의 모든 교회가 하느님 대신에 돈을 섬깁니다. 오늘 대개의 한국교회는 교회가 아니라 교회를 가장한 상점들일 뿐입니다. 그 살벌하던 파시즘 시절에도 살아있는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젠 거의 없습니다. 파시즘보다 ‘자본의 신’이 기독교인에게 더 무서운 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는 예수가 살던 2천년 전 유대사회처럼 단순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차별과 착취는 언뜻 알아보기 어려운 복잡한 구조로 되어있고, 신문이나 방송 같은 주류 미디어와 여론을 가장한 온갖 이데올로기 공작, 특히 지배체제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는 네티즌의 활약은 그 복잡한 구조를 한 번 더 덮어 버립니다. 깊고 뜨거운 신앙심이나 영적 신령함이 그 구조를 자동으로 보여주진 않습니다. 자본주의를 들여다볼 수 없다면 예수의 삶을 실천할 방법도 없습니다. 오늘 기독교인에게 자본주의에 대해 공부하는 일은 성경 공부만큼이나 중요합니다. 부동산이나 주식 같은 공부를 말하는 게 아니라 이놈의 자본주의가 대체 사람들의 피를 어떻게 빨아먹고 있는가, 우리의 신앙을 어떻게 파괴하고 있는가를 공부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예수가 정치적 박해를 받았다는 사실, 예수가 당대 지배체제와 대결했다는 사실에 정직해야 합니다. 그 대결의 방식에서 나타나는 비폭력성만을 편의적으로 발췌하여 예수의 급진성을 모호하게 만들어선 안 됩니다. 교회가 다 돈을 섬기게 되었다고 말했는데 돈 대신에 다른 걸 섬기는 교회도 있습니다. 바로 ‘내 마음’을 섬기는 교회입니다. 그런 교회의 목사님과 신도들은 다 온화하고 도사들 같습니다. 수염 이렇게 기르고 개량한복 입고 조용히 앉아서 “부시나 라덴이나 똑같다”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 흉내를 내지만, 그 폭력의 현실과 내 형제의 고통을 ‘초월’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시 예수를 팔아먹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가 단 한 번도 현실을 떠나거나 초월한 어떤 가치를 말한 적이 없다는 것을 되새겨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가 이 천박한 자본주의 세상에 살았다면 어떻게 했을까 늘 고민해야 합니다. (평신도 아카데미 강의)
Posted by gyuhang at 2005.06.07 03:32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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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넘게 다닌 교회를 이제는 가지 않는것은
51%는 게으르고 귀찮아서 이고
49%는 한국의 교회에 기대할 것 보다 실망 할 것이 더 많아서이다.
물론 나는 그에 대한 어떤 비판도 실천도 하지 않고 냉소할 뿐이므로 할 말은 없지만, 내가 속한 곳에서 실천하고 비판하는것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으로 나의 얄팍한 변명거리를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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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항씨라는 분이 어떤분인지는 모르지만 기독교를 잘 못이해 하고 있고 역사를 제대로 알고 있지는 않은것 같습니다. 선 부당이 사람잡는다고 이런 잘못된 논리로 목소리를 높인다면 나중에 망신만 당하게 될것입니다. 이사람은 성경도 잘 모르고 기독교의 역사도 잘 모르는 사람이이 틀림없고. 그런 사람이 기독교의 역사를 다 아는 사람쳐럼 이야기 하는 것이 잘 못된것입니다. 기독교를 욕하려면 안티에 들어가서 노골적으로 욕을 하든지 하면 그럼 사람이겠거니 하겠지만. 글 내용이 모든 것은 다 안다는 식으로 말을 하고 또 글을 보니 지성을 갖춘사람이고 글도 쓸줄 아는 분같습니다. 그렇다면 정확한 논리로 오른것과 그릇된것을 주장하면서 글을 펴야할것입니다.
자본주위체제가 모든것이 잘못된것 처럼 쓰여져 있는데. 그렇치 않다는 것입니다. 모든 체제는 항상 장점과 단점이~! 모순적인면이 있기 마련입니다. 다시말해 모든 체제는 완벽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분의 말에 비추어보면 유럽의 자본주의 체제가 다 올다는 얘기입니다. 그렇게 비춰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럽의 체제는 오른것이기 떄문에 따라가야 한다는 것입니까.?
이글의 4달락에서 보면 중세교회에 대해 말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중세 교회는 악의 교회라고 표현하기도 하며 기독교에 암흑기라고 말합니다. 이유를 말하면 넘길어지니 여러분들께서 기독교 서적을 찾아가시면 중세 교회가 타락의 원인이 어디서부터 출발할것인지 알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글의 사람은 그 출발점이 교회안서만의 눈으로 모았다고 합니다. 그럴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종교개혁의 출발정신은 올바른 신앙의 소유를 하자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의미가 뭐니까? 개혁의 의미 잘못된 것은 새롭게 바꾸자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게 정신입니다. 이것이 출발인데 이사람은 우리기독교의 눈이라고 말합니다. 이시대는 교황이 정치에도 관여했고. 한나라에 왕을 세우는 것도 교황이 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잘못된 교회에 반박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우리가 잘아는 종교개혁가들이였습니다. 사람들로 이들의 사상이 뿌리가 되어 일어났고 이 사람들 3달락에 나와있는 사람들이였습니다.
8달락을 보면 유럽의 교회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유럽의 교회가 어떻게 변하는지 보겠습니다. 유럽의 교회는 18세기 계몽주위로 시작하여 조금씩 쇄락의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이유는 철학이 발달하면서 인간의 사상이 하나님중심이 아니라 인간 중심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이 계시기에 인간이 있다는 생각이 아니라 인간이 있기에 신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철학자 데카르트입니다.
이렇다 보니 사람들은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성을 잃어버리고, 또 계몽주의사상이 저물때 인간의 과학이 발달하면서 검증된것을 믿게됩니다.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으면 믿지를 못하는 거죠. 이시대에 사람들은 인간의 과학을 신뢰했고, 과학만이 인간의 모든 삶을 변화시킬것을 믿었습니다. 이러다 보니 성경에 과학적으로 이성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이 나오는데 예수님의 탄생입니다. 마리아가 어떻게 남자를 모르는데 애기를 가질수가 있습니까. 이것은 과학적으로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것입니다. 또한 물위를 걷는 것도 맞찮가지입니다.
이렇다 보니 유럽의 사람들은 교회를 떠날수 밖에 없었고 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전쟁에 아무죄없는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신이 있다면 이것은 가만두는가~! 라는 생각에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고백도 합니다.
이래서 유럽의 교회는 사람들이 없으며. 또한 목사들도 유럽에서는 공무원입니다. 그들은 주의 일을 열심히하든 않하든 나라에서 월급이 나옵니다. 지역사회에서 결혼이나. 장례나 여러 기타 이러일이 있을때 목사들은 참석에서 예배인도를 합니다. 미국이나 우리나라 목사님들같이 목숨을 내놓고 사명감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다보니 유럽의 교회는 노인들 몇명만 있기 도퇴될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자본주위가 뭐 어떻고 미국이 어떻고......러시아가?~!참나
9달락에 보면 이사람은 다원주위를 말하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글의 내용이 뉴에이지적은 경향이 있습니다.
누가 우리의 이웃이고 누가 모든 사람이 형제자매라는 것입니까 불교인이 이우의 이웃입니까. 이슬람이 우리의 형제입니까. 여성이든 아들이인든 남성이든 누가 우리의 형제자매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계실때 옆에 부모와 동생들이 와있다는 말을 듣고 누가 내 부모며 누가 내 형제냐고 말씀합니다. 내부모 내형제는 여기있는 하나님말씀대로 사는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누가 우리의 형제며 자매입니까. 이것은 이사람의 다원주위를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바리새인과 율법사 제사장들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까지도 독사의 새끼라고 욕까지 하셨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우리의 형제고 자매라 이 사람 성경도 모르고 있는 사람이잖습니까~!
나머지 및에글을 보면 기독인들은 우리만 안다고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른손이 하는일을 왼손이 모르게하라고 남들이 선행을 한것을 알고 칭찬하면 그사람은 이미상을 받아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상이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기독교는 알게 모르게 사회 무수히 많은 사회봉사와 일을 하면서도 질타를 받습니다. 하지만 천주교는 틀리죠. 방송에는 있는데로 봉사의 일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천주교를 올다고 말하며. 개신교는 차가운 시선을 보냅니다.
또 잘못된 교회나 이단들 목사들 이런 교회아니 교회들때문에 방송에서나오고 보도가 되기깐. 온전한 교회마져 사람들의 안조은 시선이 선입견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러면서 교회는 모든사람들이 광신자들만 모이며 이기주의. 목사는 돈만알고 뭐이런 저런 집단이라고 말을 하는 것입다.
그런데 이사람은 이러한 색안경을 끼고 기독교를 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말이죠.
한단체를 반박하려면 제되로 된 논리와 사고로 글을 써야 할것입니다.
교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헐벗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며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과 아픔을 함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모든 믿는 사람들이 다 그들과 같이 하기위해서 그 나라에 다간다면 이 사회에서는 홀란이 올것입니다. 미국의 수많은 크리스찬인들이 다 한나라에 간다고 생각해 봅시다. 상상할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신 사명이 각자 있습니다.
그 사명대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선교사님들은 말라니아에 고통당하고 그들과 같이 끎주리고 아파하고 있습니다.
이런 논리를 펴는 김규항씨는 이런 사실을 잘 알면서 무엇을 그들을 위해 하고 있으며 선행을 합니까. 이런 논리같지 않는 논리가지고 사람들의 마음을 선동하는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조성현 / 몰라서 그러는 것인지 억지를 쓰는 건지는 모르나 정말 허위의식으로 가득하군요. 맑은 눈으로 복음서를 읽고 교회를 잘 들여다보세요. 김규항씨 말이 하나라도 틀렸나....
바보새님 ~! 진리를 아세여.~! 진리가 무엇인지 알고 계시냐구여. 이분이 성경을 잘 알고 있다면 이런 말을 못합니다.
또한 이분의 글은 뉴에이지 적인 글입니다. 뉴에지가 뭐지아십니까. 바보새님 올바른 가치관과 사고로 글을 잘 보세여
뭐가 허위허식이고 억지입니까. 유럽의 교회의 역사에 대해서 잘아신다면 말씀해보세여 제가 억지인지 허위의식을 가득차있는지 지적을 해주세여. 저는 이분의 글에 잘못된것을 지적을 했습니다. 그리고 잘못된 성경말씀이 있으면 지적하시구여. 그리고 중세에때 사람들의 생활속에 신앙은 어때는지 말씀해 보세여.
죄송합니다. 제가 미처 답글을 달지 못해서 새로운 글로 포스팅 하였습니다.
http://mokitbul.org/tt/index.php?pl=278
조성현/ 성경,진리, 가치관 운운하며 상대방을 공격하는것도 상당히 누추해 보이네요. 뉴에이지? ? ㅎㅎㅎ. 웃고 갑니다
조성현/ 글이 너무 빈곤합니다. 웃고갑니다.
조성현님은 김규항님의 글을 잘못 이해하신 것 같군요. 올바른 신앙을 소유하자는 같은 의도를 가지고 계신 것 같은데 말이죠. 아참...그리고, '달락'이 아니고 '단락'이랍니다. 맞춤법을 많이 틀리셨는데, 다른 부분들은 실수라고 생각하려고 해도 '달락'은 여러번 반복하셨길래 혹시나 모르시는건가 하여 언급해 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