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종원에 다니는 친구가 오랫만에 연락이 왔다. 학보사에서 일하고 있으니 평크난 원고를 메꾸어 달라는 청탁. 때는 보릿고개, 원고료가 8만원에 달한다기에 승낙했다. -_-;;
당신, 그리고 당신 친구들의 미래는
아무도 그가 대통령이 될 거라 예상하지 못했지만, 옛 여당이었던 사람들이‘좌파정권’이라 말하는 정권이 들어서고, 많은 사람들은 더 잘 살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어떻게 보면 세상은 많이 바뀌기도 했다. 내가 대학에 들어왔던 2002년, 학교에서 만났던 과 선배는 자치기구 학생회장을 했으며 한총련 탈퇴서를 쓰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반년이 넘게 수배생활 중이었고, 결국 그해 봄에 연행되어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하지만 4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 선배가 했던 학생회장을 하고 있지만, 아무도 나에게 수배생활에 대한 염려를 하지 않았고, 한총련 탈퇴를 권유받거나, 경찰의 출두요청서 따위를 받지는 않았다. 사회 전체로 보면 작은 하나이겠지만, 진보진영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나는 학생회장을 할 자유를 얻은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많이 좋아졌다, 고 말하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세상은 너무 넓다. 1994년 "가진 자를 모두다 못 죽인 것이 한이다."라고 했던 소위 ‘지존파사건’은 우리사회의 양극화현상이 낳게되는 분노가 얼마나 극단적이고 잔혹하게 표출될 수 있는가에 대한 경종이었다. 그러나 10년뒤 2004년, 유영철연쇄살인사건은 그러한 분노와 꿈도 희망도 잃은 무산자가 사회에 가하는 테러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서민들의 잇단 생계비관자살은 그 분노가 이제는 좌절로 변화하는 것이 아닌가, ‘부모가 이혼한 뒤 비닐하우스에서 혼자 지내다 개에게 물려죽은 9살, 엄마 공장 야근간 사이 집에 불이 나 죽은 4살·2살, 보험금 때문에 엄마가 건넨 독극물 요구르트 먹고 죽은 9살’ [주:한겨레신문, 2005.11.17일자] 아이들의 이야기를 볼 때면 그 좌절은 이제 사회의 희망을 죽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슬픈 분노가 생겨난다. 삶이 모두에게 늘 아름다운 것은 아니겠지만, 분노는 이 모든 일들이 계속 반복된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더욱 더 커진다. 1980년대 후반, 부모가 일을 하러 간 사이 화재로 죽은 아이들을 노래로 만든 정태춘의 <우리들의 죽음>은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현재(2004.03.10, 2004.12.09, 2005.10.13)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비극적인 현실 앞에서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노력’은 철저하게 무시된다. 그것은 더 이상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다. ‘이제는 철 지난 이야기, 다 끝난 이야기, 더 이상 필요하지 않으며 이룰 수 없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로 치부 될 뿐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점점 보수적이 된다. 청년, 학생들이 우리 사회의 진보를 이끌었던 시절이 있었다. 오늘날 청년 학생들의 행보는 역시 ‘보수’이다. 대학가의 학생회가 反운동권으로 이루어진다던지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대학생들은 이제 그런 ‘학생회’ 같은 것엔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이 관심 가지는 것은 자신과 자신의 친구들의 미래 같은것이 아니라 학점, 토익점수, 대기업 입사, 대박같은 눈앞에 놓인 경쟁 뿐이다. 그 경쟁에서 이기고나면, 또 새로운 경쟁이 있고, 계속해서 이겨가는 와중에 그 옆에는 누군가의 분노와 좌절이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경쟁에서 이기면 행복이 있을거라 생각하지만, 그것만 바라보고 달려가지만, 하지만 사실이 그렇던가. 특별한 원한도 없이 무차별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사람과 함께 행복이 있던가. 대구지하철참사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무슨 잘못이 있어서 죽었던가, 그저 그 시간에 지하철을 타고 삶을 살아가고 있었을 뿐인데. 연쇄살인범에게 죽어간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 아니던가.
나는 아니라는 생각 하나만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아직 나는 아니지만, 나의 친구가 지하철을 타다가 죽고, 나의 이웃이 자다가 이유없이 칼에 찔려 죽을 수도 있다. 나의 친구가 그 삶의 좌절과 분노 속에서 살인을 택할 수도 있다. 내 이웃이 삶에 힘겨워서 제 아이를 죽일수도 있다. 그리고 그 것이 내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다들 외면하고 살아가고 있다. 영화 <증오La Haine>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고층건물에서 떨어지면서, ‘아직은 괜찮아, 아직까지는 아니야’를 중얼거리는 남자의 추락과 우리의 경쟁은 그대로 겹쳐진다.
누가 먼저 떨어지느냐, 누가 어디로 떨어지느냐를 경쟁하며 살아가고 싶지 않다. 좀 더 나아지면, 누구는 떨어지고 누구는 떨어지지 않아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서로를 밀어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겠지. 그 누구도 떨어지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싶다. 고층건물을 바꾸어야 한다면 그렇게 하겠다. 분노와 좌절로 점철된 나와 내 친구들의 미래를 바꾸고 싶다. 그렇지 않고 어떻게 개인의 행복과 미래가 있을것인가.
맨 마지막 문단은 친구에 의해 약간 수정되었다.
[보기]
누가 먼저 떨어지느냐, 누가 어디로 떨어지느냐를 경쟁하며 살아가고 싶지 않다. 무언가 좀 더 나아지면, 누구는 떨어지고 누구는 떨어지지 않아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서로를 밀어내야만 하는 현실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누구도 떨어지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바란다. 누군가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소리 높여 분노하는 세상을 바란다. 무기력으로 점철된 젊은이들의 현재를 바꿀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렇지 않고 어떻게, 행복한 미래를 기대할 것인가.
마감시간 약 30시간 전에 청탁을 받고 마감시간 3시간 전부터 쓰기 시작해서 마감시간을 2시간 넘겨 전해주었다. -_-;
아마도 내 생에 처음으로 돈을 받기 위해 써본 글이 될 것이다.
이건 비밀인데,
이 글은 원래 "운동권이 사라진 요즘 실태"를 써줬으면 좋겠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 고민하던 중 김규항씨의
<청년들의 근황1,2,3>이 생각나서 참조하여, 개혁세력은 물론 소중하다. 그러나 진보세력의 발전 없이 사회는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는 것을 삶을 통해 반증해보자는 것을 주제로 구상되었다. (하하-_-)
그러나 글이 절반을 넘어가면서 나는 체념하는 심정이 되었다. -_-;;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런 글이 만들어졌다. -_-;;;; 내 손가락으로 키보드를 두드려서 만들어 지고 있는 글에 대하여 체념하는 심정을 느끼는 일은 참으로 독특한 경험이었다.
읽게 될 사람들의 의식지형에 대해 전혀 일수없고 예측이 거의 불가능한(일반적인 대학과는 다른 학교이므로) 상황에서 글을 쓰는것은 매우 조심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글이 저렇게 마무리 된 것에 대한 핑계거리도 되리라.
그리고 글의 두번째 문단은, 예전에 정치사회학 기말레포트로 썼던 글을 긁어왔다. 내가 쓴 글이니 표절-_-은 아니겠지;
8만원을 받으면, 밀린 가스요금과 전기요금을 내겠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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