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4'에 해당되는 글 4건

  1. 쉬운 감상 2010/04/26
  2. 작은 차이 2010/04/22
  3. 작은 연못 2010/04/15
  4. 다재다능, 혹은 소재무능 2010/04/01

쉬운 감상

from 백수의일상부유 2010/04/26 17:43
"오늘 비가와서 얼마나 더 힘들까 몰라." 엄마는 교회에서 알게 된 지인이 천안함 사망자 유족이라 평택 제2함대 사령부에 문상 다녀오셨다. "그 어린 자식들은 다 어떡하고." 엄마는 눈이 붉어진다. "죽은 애들도 너무 어리잖아. 스물 한두살짜리 애들인데." 나는 국수를 먹으며 우물우물 대답한다. "가족들이 다 지쳐 있더라구. 벌써 한달이 다되니..." 실종자 수색을 중단하자고 처음 제안했던 분이 엄마의 지인의 가족이라고 했다. "근데 그 아저씨도 그렇게 계속 울더라." "응. 억울하겠지." "아직 인정을 못하는 사람이 많나봐. 배 인양해서 배수작업 하는데 배에서 왜 물이 나오냐며 울고 혼절하고 하더래." "어떻게 인정 하겠어." "병사들도 그렇지만 처자식 있는 사람들은 어쩌려나 몰라." "그러게." "그래도 지금도 군대에서 이유도 모르고 죽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나마 보상도 받고 하니까 낫다고 해야할란가." "보상이 되진 않겠지만." "그렇지."
아마도 이 건은 미결사건이 되겠지, 물론 어떤 방법으로든 수사는 종결되겠지만 이미 신뢰를 완전히 잃어버린 정부와 군 당국이 내놓는 결론에 대해 만족하는 사람은 없겠지, 그리고 어떤 결론이 나오더라도, 할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겠지, 라고 생각하며 각종 추측성 기사들을 읽으며 이건 좀 그럴듯 하군, 저건 뭐야, 따위의 생각도 하지만 그건 그냥 범람하는 정보들 사이를 잠시 헤집고 다니는 것 뿐이다.
중사로 진급하고 이제 군생활이 1500일도 넘었다며 웃던 친한 후배를 생각하며 그 젊은 친구들이 얼마나 아까운지 생각한다. 전역한지 채 석달이 되지 않은 동생을 생각하며 아직 얼마나 세상이 재미있을때인 그 어린 아이들이 머리 깎고 군복 입고,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한다. 이제 가정을 꾸려 아이를 갖고 자주 만나지 못하는 부인에게 미안해 하는 젊은 가장을 생각한다. 한 평생을 군대에서 노동자로 살아 온 중년 남자를 생각한다.
그렇지만 연민과 공감을 가진 사람으로서 이런 일을 어떻게 논평해야 할 지는 모르겠다. 나름대로의 세계관과 정치적 입장을 지닌 사람으로서 어떤 부분에 주목해야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감상을 자극하는 뉴스의 소용돌이들과 아이들에게서도 반강제로 성금을 모금하는 그 따뜻한 마음씨들을 어떻게 이야기 해야할 지 모르겠다.
나는 이렇게 쉬운 감상을 적을 뿐이다.
2010/04/26 17:43 2010/04/26 17:43

작은 차이

from 백수의일상부유 2010/04/22 17:34
"(...) 더구나 그는 5.18때 광주에서 죽어간, 독재 정권의 직접 폭력으로 살해당한 인민들의 피 값으로 대통령이 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미움은 더 컸다.*
 김대중 정권은 노동자에게 끝까지 가혹했다. 심지어 8월 15일 특별 사면복권 대상자 7000명 가운데 노동운동으로 구속된 노동자는 1명도 포함시키지 않았다. 우리는 더는 물러날 곳이 없었다."

* 우리가 어떤 정권이 민주적이냐 아니냐를 가늠할 때 그 정권이 과거 어떤 일을 했느냐도 물론 중요하지만, 현재 그 정권이 어느 계급의 이익에 기반을 두고 있느냐를 봐야 한다. 국민회의 또는 민주당은 서민의 당임을 자처했지만, 그들의 정책이란 것은 아무리 급진적으로 해석해도 중도우파,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넘어서지 못한다. 때론 시장경제조차 억압하는 독재 정권과 만났을 때 이들이 일시적으로 민주의 모습을 띠기도 하지만,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금과옥조로 여기는 한 이들은 노동자의 편일 수 없다. 지금처럼 경찰력을 동원한 아류 독재 정권이 집권한 상황에서 노동자들이 이들과 연대할 수 있는 지점들이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용산의 재개발이 시작된 건 현 정권 때가 아니었고, 기륭이나 이랜드 투쟁은 지난 10년 동안에 일어난 투쟁이란 것을. 개발 자본, 건설 자본, 재벌 자본들은 자유당, 공화당, 민정당, 민자당, 신한국당, 국민회의, 민주당, 한나라당 역대 어느 정권과도 변함없이 동거를 했다. 다만, 편안한 동거였느냐, 조금 불편한 동거였느냐 하는 작은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이갑용, 길은 복잡하지 않다, 2009, 철수와영희, p209.
2010/04/22 17:34 2010/04/22 17:34

작은 연못

from 백수의일상부유 2010/04/15 21:46
지난 7일 프레시안 시사회 당첨으로 왕십리에서 봤다.

<천리길>이 그렇게 슬픈 노래인지 처음 알았다. 흙 먼지 모두 마시면서, 흰 옷 입고 궤짝 짊어지고 보따리에 달구새끼 싸든 사람들이, 제 땅을 천리도 마다하고 걷지만, 초저녁 별이 빛나도, 밥냄새 구수하게 풍기며 돌아오라고 불러 줄 엄마는 없다. 굽이굽이 피와 눈물과 비명과 살점들 뿐이었던 그 길.

<웰컴 투 동막골>도 그랬지만, 영화는 다소 극적이고 한편으로는 판타지의 느낌이다. 특히 초반이 그렇다. 이 무거운 현실에서 짓눌리지 않기 위해 택할 수 밖에 없었던 장치일지도 모른다. 혹은, 원래 우리 삶의 원형이라는 것은 그렇게, 희극적인지도 모른다. 도박에 빠진 남편과 싸우고 집을 나가네 마네 실랑이 하는 젊은 부부와, 머루 따먹고 멱감고 노느라 학교에 늦는 새까만 아이들과, '바둑 두던 사람 어디 갔나'하고 상대를 약올리는 원두막에서 소일하는 동네 할아버지들과, 난리가 났다는데 학교 숙직이 걱정이던 처녀 선생과, 치고박고 울고불고 놀려대고 투닥거리다가 소꿉놀던 머시매 가시내들과….
그렇게 노근리의 얼굴들을 하나하나 훑어가는 동안, 나는 계속해서 시계를 살폈다. 이 이야기가 어떻게 끝이 나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이제 남은 건 고통의 시간들 뿐이란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느린 걸음으로 철길을 엉거주춤 뛰어오다 산산조각이 난 할아버지와, 포격이 지나간 뒤 엄마를 찾아 찢어져라 울어대는 돌쟁이 아기와, 포사격이 쏟아지는데 솜이불로 막아보겠다고 엎드려 벌벌떠는 그 허약하고 무식한 사람들과, 끝까지 미군이 도로꾸를 보내줄거라 믿었던 순진한 신식양반과, 총탄 아래서 제 아이와 제 목숨을 살리기 위해 그치지 않고 울어대는 갓난 애를 타박하던 엄마와, 젖 물려 줄 어미도 없이 울어대는 핏덩이를 물에 빠트릴 수 밖에 없었던 젊은아비와….
고래가 넘실, 넘실. 아마도 그 긴긴 삶의 상처도, 넘실, 넘실.

흔한 말이지만, 어떤 허구도 사실을 이기지 못한다. 그러나, 덮어진 사실들, 가리워진 발자국 속, 그 초라하고 연약한 삶을 이겨낼 수 있게 하는 힘, 보잘 것 없고 흔한 삶과 죽음을 존재하게 하는 힘은 이야기에서 나온다. 아마도 그래서, 그들은 이야기 하기 시작 했을 것이다.
2010/04/15 21:46 2010/04/15 21:46
다재다능이야 말로 무서운 생(生)의 함정이지요. 이것 저것 착수를 해보면 조금씩 되거든요? 그 재미에 빠지다간 자칫 호사가(好事家)가 되고 말 공산이 큽니다. 정진(精進)은 못하고. 하지만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누구나 다 각자 제 할 수 있는 일의 선수가 되어야 할 겁니다. 농사면 농사, 살림이면 살림. 그리고 민족운동, 혹은 독립운동, 같은 것 말이지요. 또 교육을 맡은 경우도 마찬가지에요. 나라의 번영에 앞장서는 일꾼들은 모두 이 불우한 시대의 선수들 입니다.
(...)
그런데 묘한 일이지요. 선수들이란 자신의 재능과 능력을 다하여 제 존재의 영역을 보다 넓고 높게 개척하는 사람들일텐데, 그 재능을 부여받은 부분에 가장 극심하고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단 말입니다. 꽃이 그 아름다움 때문에 꺾이기 쉬운 숙명과도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축구 선수는 다리뼈 성할 날이 없고, 공을 너무 세게 맞아서 금이 가거나, 삐거나 하니까요. 달리기 잘 하는 사람은 무릎 성할 날이 없지요. 넘어지는 것이 곧 달리기 선수의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상처를 각오하지 않고서는 선수가 될 수 없습니다. 위험한 일이지요.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래서 선수는 훌륭한 것 아닐까요?
(...)
선수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몸을 바치는 존재지만, 그 꿈을 이루고 싶은 수많은 사람들의 잠재욕구를 짊어지고 싸우는, 이중적인 존재입니다.
-혼불, 최명희, 한길사, 9권. p.51-52 이두석.


아침에 일어나 멍하니 누워있는데 갑자기 생각났다. 10년전에는 이 글을 다재다능하기라도 하면 좋지 않을까, generallist가 멋있잖아, 라고 생각하며 읽었는데. 그게 바로 산만하고 집중력 없는 이들이 가지는 착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답답하고 조급해서 이것저것 건드려 보다가 그만두고 혹은 건드리는 상상만 해 보다가 그만두고. 그래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나를 갉아먹고 있다는 생각만 하게 되고. 그게 지금의 나.

내가 그나마 꾸준히, 아니 꾸준하지는 않아도 그나마 놓지 않고 계속 했던 것은 독서다. 책을 계속해서 읽게 해준 힘은 바로 이런 것이다. 어느 순간, 지나간 책의 구절이 떠오르면서,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는 그런 느낌. 거기에 사춘기의 허세, 지적 호기심을 충족한다는 자만같은 것들이 더해진 것이 나의 독서의 원동력이다. 이해가 되지 않아도 좋다. 무슨말인지 몰라도 좋다. 읽어두면 언젠가, 그 말이 떠오를 때가 있고, 그 글을 옮겨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언젠가 저걸로 잘난 척 할 수 있을 때가 오고, 그 말을 빌어 내 감정을 전달 할 수 있을 때가 온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청소년을 위한 토지' 같은 책들을 반대한다. 중학생이 문장 자체를 이해 할 수 없는 글을 쓴다면 그것은 대체로 작가의 능력 문제다. 그것을 쉽게 풀어 쓴다고 해서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은 대체로 작가와 그의 글이 담아내는 삶에 대한 모독이다. 또한 '토지'같은 소설을 중학생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대체로 젊은 지성과 영혼에 대한 오판이다. 게다가 성인이 청소년보다 책을 더 많이 읽지 않는 요즘, '청소년을 위한 토지'를 읽은 청소년이 자라서 '토지'를 다시 읽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원본 소설을 읽어야 한다. 그래서 이해하지 못하고 지나갔던 말 들,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인물들의 대화와 묘사들을 삶에서 하나씩 체득하는 과정을 거쳐야한다. 삶에서 체득하는 것이 중요하다. 시간을 들여서 아니 세월을 들여서. 그 체득의 순간을 경험할 기회를 박탈해서는 안된다. 독서는 단순히 글을 읽는 과정이 아니고, 모든것을 다 이해해서 시험을 쳐야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토지'를 못 읽겠다면 딴 걸 읽으면 된다. 아이들이 '토지'의 줄거리를 익혀서 논술 따위에 써먹어야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물론, 잘 팔리니까, 계속 만들겠지만.

그렇다고 내가 뭐 원전주의자이거나 하는건 아니다. -_-

흠. 본격 무슨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는 글-_-
2010/04/01 11:45 2010/04/01 11:45